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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 3일차

배우는키친 2024. 3. 8. 10:55

 

침대에서 허지웅 작가님의 <살고 싶다는 농담> 으로 끝마친 어제. 새로 시작한 아침은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느닷없이 추울거라던 일기예보는 제주도만 비껴갔는지, 아님 내게만 그랬는지 추위는 덜하고 따스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래도 최대한 옷을 두텁게 껴입고 방을 나섰다. 이상한 꿈 때문에 생각보다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시간은 많았고 할 일은 없었다. 우도는 어제 다녀왔으니 오늘은 여유롭게 산책이나 해볼까.

 

섬바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없이 세차게 불었다. 다만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강한 햇살이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정처없이 걷는 와중에 여기저기 갈대밭이 많다. 제주도는 원래 이렇게 갈대밭이 많은가? 아니면 성산리에만 유독 많은건가. 여기저기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들과 드문드문 물웅덩이 위로 헤엄치는 오리들이 눈에 띄었다. 저 오리들만큼이나 한가로운 나는 이어진 길을 따라 목적도 없이 쭉 걸었다.

 

 
 

저멀리 절벽이라 해야 할 지,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를 곳을 향해 걸었다. 무엇이든 눈에 띄는 것이 발견되길 바라며 걷다보니 '광치기해변' 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바보같이 주변에 이런 해수욕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운좋게 발견한 표지판을 따라 열심히 걷다보니, 어제 배가 정박해있던 항구의 거친 바다와는 다른 온화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태양과 바다의 조화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눈부심에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쓰며 그 감동을 느꼈다. 그 어떤 음악과도 잘 어울리는 파도소리. 팝핑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이 반짝이며 사라지는 그 바다를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았다. 함께 이 바다를 보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 돌아보면 부족함 투성이인 내게 어떻게 이리도 많은 인연들이 생겨났을까. 홀로 떠나는 여행은 그리워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움을 느낀 후에야 새삼스레 소중함을 알아챈 어리석은 인간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걷다 무슨 용도인지 모를 내리막길을 발견했다. 바로 앞에 해녀의 집이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물질을 위해 만들어진 길인지도. 나는 내리막길 끄트머리 계단에 앉아 오늘치 필사를 적었다. 보트를 타고 떠난 죠지의 노래. 어쩜 이번주의 나와 이렇게 잘 어울릴까? 나도 보트를 타고 저 바다로 떠나고 싶어. 여전히 왼손에서 놓치 못 한 나의 한심한 꿈들을 응원하고픈 그런 순간이었다.

 

 
 

콘크리트 계단에 엉덩이가 배기도록 앉아있다가 뻐근해진 몸을 일으켜 다시 해안을 걸었다. 그저 이어진 길을 따라 쭉 걷다보니 예쁜 카페가 보였다. 바다를 향한 벽 한 쪽을 아예 창문으로 터서 활짝 열어놓은 카페 <호랑호랑>. 살짝 배가 고파 카페모카를 시키고서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에 앉아 바다를 볼 수 있다니, 이보다 완벽한 공간이 있을까.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다가 5페이지 쓰고 완성하지 못 했던 소설을 이어썼다. 그래, 은재는 그래서 살고 싶었구나. 설명할 수 없었던 그녀의 이유를 조금씩 만들어갔다.

 

한창 소설을 쓰다보니 어느새 카페에 사람이 많아졌다.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소란스러움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옮겼다. 바로 옆엔 커다란 스타벅스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스타벅스는 제주도에서도 정말 잘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미련없이 커피는 포기하고 눈에 띈 MD 상품을 집어들었다. '제주도 한정' 무서운 글자다. 별 고민없이 만오천원을 결제하게 만들었다. 아, 저 조그만 주머니가 만오천원... 상술을 욕하지 않을 수 없는 가격이지만 나는 저 사악한 금액의 주머니를 사고 말았다. 저 조그맣고 귀여운 주머니는 오늘부터 내 버즈 케이스다.

 

스타벅스의 문을 열면서 느낀건데 제주도는 가는 곳마다 하나같이 문이 무겁다. 방한을 위한건지 바람에 흔들리는 소음을 막기 위한건지 잘 모르겠으나 가는 곳마다 낑낑대며 문을 열어야 한다. 제주도민들은 팔힘이 세겠구나..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느낀건 여행지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참 친절하단 것이다. 저 무거운 문을 낑낑대고 열고선 다음 사람을 위해 버텨준다. 나도 마찬가지인 게, 다음 사람이 또다시 힘겹게 문을 열 것을 생각하면 잡아주고 싶다. 혹여 내가 놓친 문이 다른 사람에게 부딪힐까봐 걱정도 되고. 작은 친절에 보답하는 작은 웃음.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들이 여행의 기쁨이겠다.

 

플레이스 캠프에 돌아가서 잠시 쉬고난 뒤 나의 일정은 또다시 산책. 아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그렇다고 휴대폰이 뜨거워지도록 인터넷을 검색하여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닐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끝없이 걸을 수밖에. 노영심의 <사랑이 사랑에게 묻다> 에 파도소리를 얹어 들으며 걸었다. 음악과 함께 바다를 걷는 것은 조금도 지겹지가 않다. 계획도 목적도 없는 여행은 그저 바다를 봄으로써 행복했다.

 

아침의 바다와 오후의 바다는 달랐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각, 바다는 물이 빠져 아침에 보지 못 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푸른 이끼에 둘러쌓인 채로 드러난 새로운 땅. 저 작은 땅위로 사람들이 올라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끼어들어 마치 아틀란티스라도 발견한 것 마냥 즐거운 기분을 만끽했다.

 

 

드러난 땅 사이로 흐르는 바닷물은 너무 맑고 깨끗해서 마치 계곡물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군데군데 드러난 조그만 생명들이 사랑스러웠고, 이런 자연의 움직임을 신기해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사랑스러웠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모든 것은 아름다워보이기 마련인데 그동안 나는 얼마나 메마르게 살아온걸까.

 

 
 
 

 

작은 아틀란티스를 구경한 후 이어진 길을 마저 걸었다. 끝이 어딘지 모르게 이어진 길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걸까? 나 외에 걷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홀로 천천히 걸으며 바다와 이어진 동산을 걸었다. 토토로를 따라간 아이처럼 작은 숲 사이로 사라지는 길을 따라걷자 말 목장이 나왔다. 막힌 길은 아니었으니까 괜찮겠지...? 말들은 똑똑하다더니 낯선 사람인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녀석도 있었다. 밝은 햇살 아래 바닷바람에 갈기를 휘날리며 멋진 자태를 드러내는 녀석들을 보니 무척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거부감에 동물원을 가지 않은지도 오래 됐다. 고양이도 강아지도 인간도 아닌 생명체를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들은 조금 경이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찍은 멀리서 본 플레이스 캠프. 갈대밭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고 싶은 액티비티가 대부분 마감되어 아쉬웠지만 나는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를 위한 작은 공간과 바다를 향해 탁트인 길이 좋다.

 

 
 
 

현장예매가 가능했던 액티비티 <부어라 마시타>. 플레이스 캠프 내부 술집 스피닝 울프에서 진행되었다. 라임 모히또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직접 만든 칵테일을 마셨다. 초심자라 조금 맛이 애매했지만 새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2시간 동안 무제한인 맥주와 추가주문한 치킨이 아주 맛있었다. 낯선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어색하지만 술과 함께라면 어색함도 곧 무너진다.

 

 

무제한 맥주가 좀 아쉬웠지만 나홀로 여행인지라 술을 자중하고, 어제 저녁을 먹었던 폼포코식당에서 혼자 2차를 했다. 타코와사비 너무 맛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이 타코와사비가 너무 생각날텐데 어쩌나. 아쉬움을 최소화하기 위해 내일도 먹을까? 이 일기를 쓰는 동안 타코와사비와 한라토닉이 점점 줄어간다. 어느새 제주도에서의 셋째날도 완전히 저물었다. 시간은 어쩜 이리도 지체없이 흐르는지.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제 갈 길만 간다. 아, 금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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