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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 2일차

배우는키친 2024. 3. 7. 21:00

 

너무 설레었나? 조금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알람시각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났다. 커튼을 걷고 바라본 창밖은 조금 흐렸지만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제주도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들과 들려오는 새소리. 여행지에서는 아침조차 산뜻하구나. 침대 위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며 한가로이 창밖을 구경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자연의 바람을 맞는 아침이 상쾌하다. 다린의 <바닷가>을 배경음악으로 흐린 아침 풍경을 즐기며 제주도에서의 둘째날을 시작했다.

플레이스 캠프 내부에 있는 카페 도렐에서 간단히 커피와 베이글로 배를 채웠다. 숙박객에겐 10% 할인이 적용되었다! 생각지 못한 할인에 기분 좋게 쟁반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연하게 마시는 편인데 샷 하나 빼달란 말을 까먹었다. 향은 좋지만 내겐 너무 진한 커피와 함께 오메기 베이글을 먹었다. 제주도는 베이글 하나도 그냥 베이글이 아니군. 어쩐지 갓 쪄낸 떡 냄새가 나는 듯한 쫀득쫀득한 베이글은 무척 맛있었다. 짧은 아침식사를 즐기며 오늘은 뭘 할까 고민했다. 오늘은 생각한 것보다 덜 추우니까 배를 타고 우도에 가볼까? 숙소에서 항구까지는 멀지 않다.

 

짧은 고민과 결정을 마친 후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바람개비를 쥔 돌하르방이 나를 반긴다. 안녕, 오랜만이야! 곳곳에 있는 돌담들과 희미한 바다냄새가 제주도로 온 것을 실감나게 한다. 날이 흐려도 제주도는 제주도, 여행은 여행. 오늘은 바닷바람이나 잔뜩 쐬고 와야겠다.

 

 
 

여객터미널을 향해갈수록 바람이 세지는 한편 해가 드문드문 비추었다. 날이 흐릴거란 예보는 반만 맞은 듯, 중간중간 비치는 태양이 강렬했다. 몽글몽글한 구름들이 지나가고 나면 밝은 태양 아래서 조금 따뜻한 느낌도 들었다. 음, 춥지도 덥지도 않게 잘 입었다. 역시 엄마옷을 빌려오길 잘했다.

 

 
 

아, 바다다. 얼마만에 보는 바다인지 감회가 새롭다. 바람에 거칠어진 파도가 조금 무서웠지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설렘이 가시질 않았다. 3층으로 된 여객선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구경했다. 조타실 외엔 그다지 신기할게 없었으나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배 위에서 맞는 바닷바람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강하고 차가웠다. 육지사람은 촌스럽게도 그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꿋꿋하게 바다를 구경했다.

 

푸른 바다는 뱃머리에 부딪히며 흰 파도로 부서진다. 한번도 바닷가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고작 이런것만으로도 감동을 받는다. 육지사람도 바닷가에서 살다보면 이런 것들이 지겨워질까?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이렇게 제주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살고 싶은데, 섬사람들은 철부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도에 도착하자마자 해녀동상이 사람들을 반긴다. 해녀들의 억센 삶을 한 시인의 시로 비석에 기록했다. 우리 엄마는 해녀도 아닌데 엄마가 떠오른다. 자녀를 먹이는 값진 노동을 값싸게 사가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혼자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괜히 센치해지는 기분이 자주 든다.

 

 
 
 

무계획 여행자인 나는 우도에 도착해서 뭘 할지 몰라 그냥 길을 따라 올라갔다. 사람들은 조그만 자동차? 같은걸 빌려서 돌아다니긴 하던데 너무 비싸기도 하고 그렇게 곳곳을 돌아다닐 생각이 없던 터라 그냥 눈에 띄는 아무 카페나 들어갈 작정이었다. 언덕길을 오르던 내 눈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다방이 보였다. 카페라고 하고 싶지만 간판에 우도다방이라고 쓰여있으니 다방이라 부를 수밖에. 조금 투박한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닷바람을 하도 맞아 칼칼해진 목을 위해 유자차를 주문했다. 브로콜리 너마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며 미뤄뒀던 글을 쓰니 저절로 힐링되는 느낌. 작고 아기자기한 다방은 곳곳에 주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저 작은 도자기들도 손수 골라 놓으신거겠지.

창문에는 호박과 마녀모자, 박쥐 등으로 장식된 가랜드가 걸려있었다. 우도에서도 피할 수 없는 할로윈의 열풍을 바라보며 이런것도 좋지만 우리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낼 수 있는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한복의 날 같은거. 명절을 정말 휴일로 보내는 우리집은 한복입을 일이 영 없다. 한복 참 좋아하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사람들이 한복을 많이 입고 다녀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복의 하나로 자리잡으면 좋겠다. 한복이 기성복이 된다면 가격대도 좀 저렴해지지 않을까. 예전부터 리슬의 한복을 꼭 사고 싶었는데 만만치 않은 가격대와 특별한 날만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직도 사지 못 했다. 아 한복의 날, 누가 만들어줬으면.

 

 
 
 

유자차를 마시고 해안가를 따라 걷다 녹진한 성게칼국수를 먹고 나니 2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썩 할 일이 없어 숙소로 돌아갈까 하던 찰나, 해안도로 순환 마을버스가 보였다. 뭔지도 모르고 그냥 섬을 한바퀴 도나보다 싶어 티켓을 구매했는데 버스에 타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버스는 우도 곳곳에 정류장이 있었고, 원하는 곳에서 내려 관광을 즐기다가 다음 순환버스가 오면 타고 또 이동하는 식이었다. 기사님이 검멀레 해변을 꼭 내려서 봐야한다고 피셜하시길래 내릴까 했지만 순환 버스를 기다리는 길고 긴 사람들의 줄을 보고 포기했다. 버스는 많아야 20-25명 정도 탈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이미 버스를 몇 대나 보내고 타지 못 한 사람들이 버스 앞을 가로막고 항의했다. 하지만 조그만 버스를 가로세로로 늘릴 수도 없는 노릇. 버스는 정류장의 사람들을 계속 지나치며 해안가를 달렸다. '벌써 3대나 그냥 갔는데 이러다가 비행기 놓친다구요!' 앙칼지게 소리치는 아줌마의 목소리에 승객들의 웃음이 터졌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저 분은 나름 심각하실텐데. 어쩐지 귀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한 상황에 자꾸 웃음이 났다. 사람들의 웃음에 기사님도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아무도 태우지 못 하는 버스를 운전하며 승객들에게 농담을 던지셨다. '여기 내려서 부는 바람을 맞으면 소원이 이뤄진답니다. 아무도 안 내리세요? 소원 이뤄진다니까! 거참 오늘 장사 안 되네!'

 

 
 

운 좋게 버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창문을 열고 해안을 구경할 수 있었다. 깨끗하고 푸른 우도 바다 위로 햇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의 그림자를 그렸다. 구름이 점점 적어지고 해는 점점 더 자주 내리쬐었다. 작은 버스를 타고 창밖 풍경을 즐기며 달리는 해안 드라이브. 어느 정류장에서도 내리지 못 했지만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음엔 우도에 숙소를 잡고 와봐야지.

 

섬에서 맞는 바닷바람은 정말이지 강했다. 기사님은 이 정도 바람은 부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약한 육지인은 그 정도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오래 있었는지 몰랐는데 우도에서만 3-4시간을 있었다. 그 시간동안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닌 셈이다. 들어올 때 탔던 배와는 다른 배를 타고 플레이스 캠프로 돌아오니 시간은 5시. 저녁을 먹긴 조금 이르고 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 몸이 너무 피곤했다.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여행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도, 뚜벅이 여행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오늘 걸은 걸음이 만보를 넘었다. 그래도 어떻게 온 제주도인데 뭐라도 더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의무감이 조금 들었지만, 여유로운 여행이 컨셉이다 보니 그냥 편한 마음으로 숙소에서 낮잠을 청했다.

 

 
 

깨어나보니 낮잠이란 말이 무색하게 창밖이 완전 새까맸다. 더 자기에도 뭘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밤에 하는 액티비티를 해보려 프론트에 문의해봐도 오늘은 모든 예약이 다 찼다고 했다. 아쉽지만 침대에 누워 오늘치 필사나 좀 하다가 배가 고파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식사는 단촐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빵집을 들른다는걸 까먹었다. 하는 수 없이 플레이스 캠프 내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귀여운 너구리 캐릭터가 메뉴판마다 그려져 있는 폼포코 식당. 아기자기한 메뉴판을 보며 메뉴를 골랐다. 이곳 또한 플레이스 캠프 숙박객이라면 할인이 적용된다!

 

 
 
 

오늘의 메뉴는 흑돼지 나폴리탄과 한라토닉. 밖에서 나폴리탄을 사먹어본 것은 처음이다. 늘 집에서 대충 케찹이랑 소세지 넣고 볶아먹었었는데, 제주도에서 흑돼지가 들어간 남이 만들어준 나폴리탄을 먹으니 맛도 기분도 새롭다. 적당히 달고 짠 나폴리탄과 적당히 달고 쓴 한라토닉. 두 메뉴가 무척 잘 어울린다. 특히 흑돼지고기가 전혀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씹힌다. 나폴리탄 아래 숨겨진 계란지단과 번갈아가며 스파게티 면이랑 같이 먹으니 한 접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나니 한라토닉이 반절 정도 남아 시킬까말까 고민했던 타코와사비를 추가주문했다. 아, 이 얼마만에 먹어보는 맛 좋은 타코와사비인지! 나는 원래 타코와사비를 정말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이걸 맛있게 하는 집을 잘 보지 못 했다. 얼린걸 녹여내는 것 뿐인데도 녹이는 정도와 양념의 차이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인 안주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내 취향에 딱 맞는 타코와사비를 만나게 되다니,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 이걸 또 언제 와서 먹어보나.

 

제주도에서의 둘째날이 훌쩍 지나간다. 사실상 첫날은 이동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의 본격적인 첫날은 오늘인 셈이다. 1분 1초가 아쉬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가겠지. 벌써부터 돌아갈게 아쉽다. 제발 제주도에 있는 동안만 시간아 조금 천천히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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