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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리뷰 (스포0)

배우는키친 2024. 3. 7. 20:20
우리, 이제 예전처럼은 못 돌아가겠지?

 

마음은 항상 준 만큼 돌아오진 않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친구 사이에도 그런 일은 잘 없죠.

 

강이는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고등학생입니다. 공부에 관심 있지도 않고, 딱히 뭐에 의욕이 있지도 않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지만 나타나는 좁고 낡은 집도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있을 때만 환하게 웃는 강이는 그 순간이 가장 소중하고 즐겁습니다.

 

강이에게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어딘가 불만이 많아 보이는 소영이와, 지나친 가정 폭력에 어딘가 굉장히 무뎌져버린 아람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사이 좋은 세 사람이지만, 함께 가출을 결심하게 되면서 우정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최소한의 보호를 벗어나 마주하는 세상은 폭력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소영이의 태도는 점점 신경질적이게 되고, 아람이는 생활비를 위해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되죠.

 

소영이는 가출을 통해 확실히 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연기학원을 다니는 것이죠. 몇 달 가출하고 돌아오면 반대하던 부모님도 결국 두 손 두 발 들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만 소영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집 밖의 세상이 생각 이상으로 험난하다는 것과, 강이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죠. 아람이의 퇴근이 늦던 어느 더운 여름밤,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만들게 됩니다. 그 비밀이 소영이를 무척 혼란스럽게 만들고, 결국 이 가출을 끝내게 만들었습니다.

 

아람이도 가출을 통해 확실히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하고 술집에서 일을 할지라도 적어도 그곳엔 아빠의 폭력은 없었거든요. 매일같이 때리고 온 몸에 상처를 내는 아빠보다는 바깥세상이 나았던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아람이는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짓죠. 며칠 뒤 아람이는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학교에 나타납니다. 영화 속 배경은 대략 200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 20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은 가정 내 폭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람이가 그런 얼굴로 학교에 나와도 이를 걱정해주거나 해결해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죠.

 

강이만 가출을 통해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에 심취한 엄마나 좁아터진 집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을지는 몰라도, 바깥세상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투정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가출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사이가 틀어지기나 하죠. 예상치 못한 부모님의 환대에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제 강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친구관계는 끝이 나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요. 소영이와 아람이의 이유는 명확하지만 강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이는 그저 친구들이 좋았을 뿐이고, 향냄새 가득한 좁은 집이 지겨웠을 뿐이죠.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무채색 같던 강이는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하면 지금보다 좀 더 명확한 무엇이 생길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들은 강이만큼 우정을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죠. 소영이는 강이와 만들게 된 비밀이 너무 싫어서 강이를 왕따시키고, 아람이는 눈 앞의 불쌍한 고양이를 위해 강이를 버립니다. 아무렇지 않게 강이가 숨겨둔 칼을 꺼내며 칼은 음식을 썰기 위해 있는 거라고 말하던 그녀의 따뜻함은 값싸고 헤펐습니다. 두 번째 가출 후 그나마 따뜻했던 집도 불편한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진 강이는 칼을 들고 집을 나섭니다.

 

나한테 왜 그랬어?

 

강이의 물음에 소영이는 대답을 회피합니다. 소영이로서는 강이와 있었던 어떤 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일로 강이가 괴로워하든 말든 자신은 원하는 바를 얻었고, 이에 방해될만한 일은 모두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죠. 강이는 모른 척 뒤돌아서는 소영이에게 달려들어 칼로 찌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광고에 출연한 소영이의 모습을 보며 절규합니다.

 

가출 이후 삶이 망가져버린 강이. 어떻게 해야 되돌릴 수 있는지, 되돌릴 수 있기는 한건지 강이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소영이와 관계를 회복해보려 노력하고, 차라리 벗어나보려고도 노력하지만 남은 것은 피투성이가 된 손 뿐이죠. 아람이는 언젠가 아빠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 것이고, 소영이는 칼에 찔린 사건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겠죠. 저멀리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 것은 강이 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우리는 더 나아지기 위해 기꺼이 더 나빠졌다.' 하지만 강이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바람에 이불보가 휘날리듯 친구들을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던 강이. 어떤 중심을 갖지 못하고 친구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강이에겐 무엇이 필요했던 걸까요.

 

 
진짜 여고생 같았던 세 친구

기대한 것보다 방민아 배우님의 연기력이 훨씬 뛰어나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무척 높아 보였습니다. 정말 그 시기의 방황하는 소녀, 그 자체였던 것 같아요. 저는 원작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혀 모르고 봤는데요, 만약 배우가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지 못했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강이를 이해하기 정말 어려웠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민아 배우님 외에도 연기 구멍이 전혀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강이의 엄마 역할을 하셨던 배우님의 연기가 기억에 남네요. 꽃을 따며 오열하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다음엔 책도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