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춤] 드라마 리뷰(스포0)

아무도 없는 숲에서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나는 난다고 생각해.
드라마 스페셜 - 아득히 먼 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때가 올 것을 알고 있지만, 마치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죽음을 잊고 삽니다.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괴로워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무엇을 위해서 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걸까요?
간략 줄거리

드라마는 주인공 현이의 대학 선배, 파랑이의 자살을 기점으로 시작됩니다. 경찰은 현이가 고인의 생전 마지막 통화 대상이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묻습니다. "자살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무언가 아는 듯 모르는 듯 혼란스럽습니다.
친구들은 파랑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연출한 연극을 다시 무대에 올리기로 합니다. 현이는 어딘가 탐탁지 않아 보입니다. 파랑이는 이 괴상한 연극에 무척 집착하면서도, 어딘가 혼이 빠진 듯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두들 그에 대해 알게 모르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죠.
현이는 파랑이의 마지막 연극이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극 중 인물들의 모습은 굉장히 불안하고 절박하지만, 유일하게 찾아낸 희망은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그들의 모습을 통해 파랑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3가지 시점
드라마는 3가지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파랑이의 추모 공연을 준비하는 현재 시점과, 파랑이 살아생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여주는 과거 시점, 파랑이가 집착했던 연극 속 등장인물들의 시점입니다.
현재 시점
현이는 파랑이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파랑이의 아버지는 유품 정리를 부탁하죠. 거절할 새도 없이 열쇠를 건네받은 현이의 표정이 혼란스럽습니다. 현이는 파랑이가 죽은 이유도, 그가 괴상한 연극에 집착했던 이유도, 파랑이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까지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과거 시점
사람들은 연극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연극을 무대에 올리자고 강하게 밀어붙이던 파랑이는 무척 불성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연습에 잘 참여하지도 않고, 어쩌다 참여하는 날엔 졸기 일쑤입니다. 친구들은 그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가죠. 그러던 어느 날 모두들 알게 됩니다. 파랑이가 연극인들의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떳떳지 못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런 그를 이해하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파랑이에게서 모든 친구들이 떠납니다.
연극 속 등장인물들 시점
지구와 태양이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멸종해버린 인류. 이제 지구에는 인조인간들만 남아 있습니다. 인조인간은 태양열로 배터리를 충전하기에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러나 그런 시기도 잠시였을 뿐, 이제 태양이 죽어갑니다. 모두들 방전될 날도 머지않았죠. 처음 겪어보는 "죽음"이란 공포에 다들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 와중에 한 인조인간은 고민합니다.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언젠가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거지?"
주관적 해석

춤을 추라
인조인간들은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목숨과도 같은 배터리를 소모해가며 마지막 인류학자를 찾아갑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그는 춤을 췄다고만 말하죠. 어째서라고 묻는 질문에는 닿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정말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자, 마지막으로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하면 좋냐고 묻습니다. 인류학자는 다른 말은 일체 없이 춤을 추라고만 말합니다. 인조인간들은 도저히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류학자가 하란 대로 춤을 춰봅니다. 열심히 손과 발을 맞춰가면서요.
춤을 추라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마치 외계인이라도 되는 양 서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기를, 그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끝없이 애씁니다. 죽음 따위는 망각할 정도로 타인을 염원하느라 바쁘죠. 누군가 그 노력을 비웃을지라도 끊임없이 처절하게 몸부림칩니다. 타인에게 닿기 위하여 끝없이 손을 내밀고 또 내미는 그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과도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타인에게 손을 내밀었던 파랑이는 진한 외로움과 관계에 대한 갈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끝내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못하죠. 알기 쉽게 말로 풀어 설명해도 결국 이해받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헤어 나올 길 없는 절망에 갇히는 것이니까요.
친구들은 아무도 파랑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파랑이는 제대로 돈도 받지 못하는 예술계의 부조리를 바로잡고 싶어 했지만, 친구들은 그런 파랑이의 모습을 그저 허울뿐인 이상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연극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죠.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 연극은 파랑이의 마음 그 자체였는데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아무도 없는 숲에 홀로 위태롭게 선 나무. 그 나무가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기 전까진 아무도 그곳에 나무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겠죠. 이렇게 사무치게 외로워하는 인간이 있다는 걸 살아있는 동안은 아무도 몰랐겠죠.
길었던 현이의 머리카락이 파랑이의 죽음 후 왜 짧아졌을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이토록 잔인할 줄은 몰랐습니다. 파랑이의 셔츠 소매에 걸린 머리카락을 현이는 불태워버립니다. 그리곤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파랑이의 마음과 말들을 모두 부정하며 매정하게 돌아서죠. 머리카락을 불태우면서까지 관계를 끊어내다니.. 파랑이의 상처받은 얼굴이 머릿속에 박혀서 사라지질 않습니다. 타인에게 이해받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현이는 아주 뒤늦게야 파랑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지만 이미 나무는 쓰러진 이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