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당일치기 여행
중학교 이전의 내 유년시절은 대부분 대구에서 지냈다. 산 아래 달동네를 전전하며 초등학교 6년 간 무려 7번의 전학을 다녔다. 덕분에 내 번호는 늘 40번대. 매년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새로운 학기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인복은 있었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연락하는 오래된 친구가 몇 있다. 오늘은 그 오랜 친구 중 하나인 김볶(가명)의 생일을 맞아 아주 오래간만에 대구에 들렀다.
'어째 매 여행마다 시작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정신 못 차리고 늦잠자다가 기차를 놓쳤다. 집에서 기차역까지는 버스로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걸 늦다니. 여행이라고 할 수준의 일정도 아니지만 마음이 조급해지니 제주도에서의 첫날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만큼 고생하진 않겠지....? 택시를 타서도 절대로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으리란 예감에 기차 도착 약 2분 전 티켓을 취소했다. 아깝게 떼인 수수료 500원. 사실 이 정도 수수로면 아주 친절한 처사라고 보는 것이 옳지만, 5분만 더 일찍 나왔어도 예정대로 타고 갔을 것을.. 괜히 아까웠다.
본래 타려던 무궁화호를 취소한 뒤 srt 기차를 예매했다. 대구에는 대구역과 동대구역, 큰 기차역이 이렇게 2개 있는데, 그 중에서도 ktx나 srt가 도착하는 곳은 동대구역이다. 김볶이 대구역으로 마중나오기로 했는데... 나의 늦잠으로 일정이 틀어진 것이니 그냥 점심을 예약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동대구역에서 식당은 제법 먼 거리다. 어렸을 적 살던 곳이긴 해도 이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기엔 너무 낯설은 곳이 되었으니 기차역에서 또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비에만 얼마를 쓰는 것인지 모르겠네.
택시를 타니 머리가 하얗게 샌 기사님이 네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출발하셨다. 그런데 이놈의 네비가 우회전이 안 되는 곳에서 우회전을 하란다. 기사님은 내게 이곳은 우회전을 할 수 없는 길이라고 설명하시며 직진을 하셨다. 정작 나는 이어폰을 꽂은 채로 네비가 하는 말 따위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는데 너무 자세히 설명해주시길래 당황했다. 기사님은 네비대로 가지 않는다며 택시회사에 컴플레인을 넣는 손님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한다고 하셨다. 그렇구나... 손님들이 조금 야박한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길을 빙빙 돌아가는 택시기사들도 분명 있으니 뭐라 할 수 없기도 하고... 그냥 할아버지 기사님도 고생이 많으시구나 생각이 들었다.

택시에서 내려 도착한 식당은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아주 앙증맞고 귀여운 집이었다. 대구 동성로의 지중해식 레스토랑 '인투'. 귀엽디 귀여운 집과 파란 하늘, 노란 은행나무의 조화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 보니 이 골목 한 곳에만 맛집으로 보이는 예쁜 가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앞뒤로 쭉 걸었을 뿐인데도 가보고 싶은 가게가 너무 많았다. 다음에 한 일주일 정도 머무르면서 가게를 다 들러봐야겠단 생각과 동시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결국 이곳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든 고향도 나도 너무 많이 변해서 익숙함을 찾기 어려웠다.

약간의 씁쓸함을 뒤로 하고 들어선 가게는 내부도 너무 귀여웠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넓은 내부는 아기자기하면서 깔끔했다. 약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제니바 할머니 집에 간 느낌? 여기서 치즈케이크 먹으면 정말 맛있을 것 같다.
나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김볶은 자리에 앉자마자 느닷없이 내게 선물을 건넨다. 예쁜 꽃무니가 새겨진 마스크 스트랩. 생일인 사람은 자기면서 나에게 선물을 준다. 예쁜 스트랩을 받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에 질세라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스트랩이라.. 제니바 할머니가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준 머리끈이 생각난다.

즐거운 기분으로 열심히 고민해서 고른 인투의 세트메뉴! 에피타이저와 파스타, 라이스 메뉴를 한가지씩 고를 수 있는 Set B 가 32000원이다. 오일의 느끼함을 아주 약간의 매콤함으로 깔끔하게 잡아주던 #감바스카주엘라 너무 맛있다. 에피타이저부터 기대감이 마구 상승된 우리 테이블에 #링귀네라구 와 #바질크림리조또 가 이어서 나왔다. 이 집은 정말 새우가 너무 맛있다. 새우들이 하나같이 탱글탱글하고 부드럽다. 새우 크기가 클수록 익혔을 때 조금 질긴 식감을 가질 수 있는데, 이 집은 감바스의 새우도 리조또에 들어간 새우도 하나같이 식감이 좋았다. 링귀네라구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사실 이전에 썩 맛이 없는 라구 파스타를 먹은 적이 있어서 기대하지 않고 시킨 메뉴였다. 순전히 김볶이 먹고 싶다 해서 시킨건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게다가 보기보다 양이 많다. 양이 너무 많아서 김볶과 나는 나약하게도 음식을 조금 남기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머릿속에 아른거릴텐데 어쩌나.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을 산책했다. 김볶은 정말이지 스파르타라 인투에서 김광석 길까지도 걸어가야했다. 소화시키고 그 근처 가게의 맛있는 레몬케이크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분께 소개받은 집이라 내가 추천한 곳이었는데 걸어가게 될 줄은... 오늘 낭비한 택시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정말 많이 걸었다...
절대 봐주지 않는 김볶....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자체는 그리 길지 않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걷는데 한눈 팔지 않고 걸으면 길어야 15분? 그보다 더 짧을 수도. 나는 걸음이 느리고 주변 가게를 하나하나 다 살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걷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방에 달만한 배지를 기념품으로 팔았으면 하나 샀을텐데, 기념품들이 다 마그넷이나 그립톡 이런 것들이라 아쉬웠다.
길의 벽면에는 서른 즈음에, 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 등 故김광석씨의 노래들이 벽화로 표현되어 있었다. 이등병의 편지의 영향인지 벽면에 자물쇠와 군번줄을 함께 매다는 하트모양 구조물이 있었다. 아마 입대해야하는 연인과의 사랑을 맹세하기 위한 것인듯 한데, 웃긴건 군번줄은 하나도 안 보였다. ㅋㅋㅋ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스탬프 함이 놓여져있다. 3~4군데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2개 밖에 찍지 못 했다. 다음엔 꼭 다 찍고 와야지!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을 한바퀴 쭉 돌고 나서 들른 '르플랑'. 이집의 레몬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단 얘기에 들렀다. 입구부터 너무 귀엽고 난리다. 들어가보니 레몬케이크라기보단 마들렌? 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김볶의 생일케이크를 대신하기 위해 레몬케이크 2개에다가 투썸 초를 꽂았다. 케이크는 다소 빈약할지라도 초는 성대하게^^
르플랑에서 볼일을 마친 우리는 또다시 열심히 걸어야했다. 김볶이 카라얀의 레전더리 콘서트를 예약주었기 때문! 내가 사는 지역의 cgv에서는 레전더리 콘서트를 상영하지 않아서 볼 수 없었는데 운좋게도 대구 한일극장 지점에서 상영 중이었다. 나를 위해 비싼 씨네앤포레까지 예매해준 김볶, 고마워.ㅠㅠ

처음엔 카바나 좌석이라고 해서 그게 도대체 뭐야? 했는데, 도착해보니 정말 예쁘고 폭신폭신 편안한 좌석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제법 사치스러운걸...? 신발을 벗고 편안히 누워 카라얀의 차이코프스키 지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연주곡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과 6번.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곡은 6번 '비창'이다. 유튜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영화관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극장 사운드와 함께 감상하는 것은 역시 달랐다. 당연히 실제 연주를 듣는 것만큼 웅장함을 느낄 순 없었지만, 언제 또 이만큼이나 생생하게 카라얀의 지휘를 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편안한 카바나 석에서!
상영이 끝나고 우리는 또다시 저녁식사를 위해 걸었다. 동성로에서 또다시 동대구역 옆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까지 걸으며 내가 떠난 동안 대구가 얼마나 변했는지,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인 우리의 어릴적 추억은 어땠는지, 최신 근황은 어떠했는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친구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어쩌면 조금 특별한 일이다. 비록 그 걸음이 무려 3만보나 되어 무릎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지만.. 언제 또 이렇게 걸어보겠어. 김볶, 좋은 하루였고 생일 축하해!